큐티

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

찐찐~* 2024. 10. 20. 08:55

<결론>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다른 증인들을 열거한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하며 구원자로서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언약을 성취할 메시아의 사역과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다. 다른 제자들과 니고데모도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였으며, 요한복음 전체의 강조점은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고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월,하나님의 어린 양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한 것은 메시아의 사역과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려는 요한복음의 목적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창세기 3:15에서 처음 주어진 구원자에 대한 약속에서 비롯된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어린양이시다. 

 

화,요한의 두 제자

“요한과 안드레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불신의 정신을 갖고 있었더라면 예수의 발아래서 배우는 자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판단하는 비평가로서 그에게 나왔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 가장 귀한 기회의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이 첫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례 요한이 전도할 때에 성령의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강조되는 점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혀서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수,빌립과 나다나엘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심으로 나다나엘을 한 마디로 설득하신다. 예수님은 신성한 통찰력으로 나다나엘이 그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며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을 보셨다(시대의 소망, 140, 141 참조). 이후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랍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높여 칭하는 고백을 한다. 예수께서 자신을 알고 계신다는 사소해 보이는 사실이 어떻게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이어지는지 주목해 보라. 

 

목,니고데모의 증언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회심이 필요하다고 믿었지만, 선택받은 백성인 자신들에게도 회심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떤 민족으로 태어났거나 어떤 신앙 안에서 성장한 것이 결코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핍박을 받아 흩어졌을 때 니고데모는 담대하게 전면에 나섰다. ...위기의 때에 그토록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던 그가 바위처럼 굳세게 서서 제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복음 사업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재물을 공급하였다. 그는 전에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던 자들에게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그는 이 세상의 재물에는 가난하게 되었으나 예수와 회견하던 날 밤에 시작되었던 그 믿음에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177).

 

금,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니고데모는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복종시켰을 때에 그는 하늘나라를 보기 시작하였다...만일 우리가 이 이끄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못 박게 한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그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 생명을 준다. 생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심령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그분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는다. 그 때에 하나님의 율법이 심령에 쓰여지게 되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시 40:8)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시대의 소망, 175).

 

-교과 본문 중에서-

 

침례 요한의 선포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 자체가

메시아의 사역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서부터 의문이 시작됐어야 한다.

 

왕, 군주가 아니라 어린 양.

이미 첫 소리부터가 

세상이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모두는 자기 프레임안 '왕' 메시아에만

꽂혀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침례 요한의 외침에서부터 

메시아의 참 특성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는다. 

맨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오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나는 어디에 꽂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오해하고 있을까.

 

제대로 보고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를,

내 것을 내려놓고 깨뜨리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가족 동행들 어려운 사람들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