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7:12 그리스도교는 '하라'는 종교다.
마태복음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참조 7:7 주석; 눅 6:31. 그리스도인이 동료 인간을 취급하는 방법은 신앙의 진위를 가려내는 시금석이 된다(요일 4:20; 참조 마 25:31~46).
황금률은 십계명 중 5~10번째 계명의 의무를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이웃 사랑에 대한 위대한 원칙의 또 다른 성명서이다(참조 마 19:16~19; 22:39, 40; 요일 4:21). 황금률을 생활의 실제 규율로 삼는 자들만이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기를 기대할 수 있다.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확실한 지표이다(참조 요일 3:14~16).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는 심오한 사상가들은 그 황금률에 나타난 숭고한 진리를 깨달았으나,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형태로 진술하였다. 실례로, 다음 말은 예수 이전 세대에 가장 존경받던 랍비인 힐렐(Hillel)의 말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대에게 싫은 것은 이웃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모든 율법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것의 주석이다”(Talmud Shabbath 31a, Soncino ed., 140). 황금률은 경외서 토빗서(Tobit)에도 나타난다(4:15): “그대가 싫어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 그리고 아리스테아스(Aristeas)의 편지에도 나타난다(ed. and tr. by Moses Hadas, 181): “그대에게 불행이 임하기를 바라지 않고, 좋은 것에 모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대는 그대에게 복종하는 자나 거슬리는 자를 한결같이 다루어야 한다.”
예수가 부정적인 개념을 긍정적으로 변형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거짓 종교 체제들, 그리고 참 기독교와 종교 형태를 갖추고는 있으나 복음의 생명력을 부인하는 종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황금률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해주기를 바라는, 곧 최고의 이기적인 마음을 취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곧 최고의 이타심으로 바꾼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절정이다. 이것이 그를 따르고 그의 이름을 지니고 사는 자들 속에서 살아남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참조 5:48 주석).(성경주석)
처음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앞 구절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이 황금률이 신앙의 정수인 것을 생각할 때,
뭐든 이룰 수 있으신 아버지의 능력을 힘입어
신앙의 정점에 이르라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위대한 사상가들도
황금률에 근접하는 말들을 남겼지만
그것이 모두 남이 불편해할 일을 하지 말라는 식의
금지어들이었다면,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내가 취급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남에게 대하라는 적극적인 교훈이라는 말씀도
인상적으로 와닿는다.
그리스도교는 적극적인 종교다.
뭘 먹지 말아라, 뭘 하지 말아라는,
금욕주의, 소극적 종교가 아니라
나가서 보여주고 증거하고
사랑하고 품으라는 적극적인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참
하지 말라는 것에 얽매여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지나치게 억누르면서
수동적으로 신앙을 했던 것 같다.
남의 눈에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데에만 열심을 내면서
내 본성은 감추고 가리고만 살았다.
어쩌다 내 본성이 드러나면
미움 받을까 손절 당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사랑받고 싶어서 안달안달하면서..
그런데 또 막상 사랑을 나누자고
가까이 다가오면 밀어내고 또 밀어내고..
생애 첫 애착관계의 실패로 인한 결과이다.
나는 요즘 이것을 극복하고 싶어서 투쟁중이다.
아니, 오래 전부터 간절히 바래왔던 일이긴 한데
투쟁을 최근에 시작했을 뿐이다.
좌충우돌 중이다.
하고싶은대로 하고 속에 있는 말도 거침없이 내뱉고
사람들을 놀래키고 상처도 주면서
비호감 인상도 주고 거친 인상도 주면서..
억눌러왔던 나의 본성과 자꾸 마주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상태는,
내 본 모습 그대로 사람들과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능력을 힘입어 본성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지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반드시 지나가야할 단계이긴 하다.
얼른 지나가고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그저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다.
나랑은 차원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신 하나님의 세상에
나도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고 싶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다른 사람들 대할 수 있기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렇게 달라질 수 있기를 고대한다..
도와 주세요.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버지께서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세요.
가족 동행들 투쟁하는 이들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