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
--------------------------------------------------------------------------------------
눅16:19-31
만일, 이 말씀이 죽은 상태의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하늘은 분명 기쁨과 행복의 장소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화까지 하게 되기 때문이다(눅16:23~31).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의 쉼 없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상태에서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으며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계 21:4).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는 날로부터 부활할 때까지 의식(意識)을 갖고 있다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속에 많이 섞여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잘 아시고 그 중요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 비유를 그들의 선입견에 따라 구성하셨다”(실물교훈,263).(일)
그리스도께서는 그 강도가 그날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 자신도 그날에 낙원에 가지 않으셨다. ... 죄인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그날 곧 ‘오늘’이라고 하시던 그 날에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죄인에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시대의 소망, 751).(월)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은 침묵 중에 있다. 그들은 해 아래서 행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피곤한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복된 휴식이 아닌가!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길거나 짧거나 간에 단지 일순간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고 깨어 일어나 영광스러운 불멸을 입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551).(화)
벧전3:18,19
(수)
계6:9-11
비재림교회 학자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는 이렇게 기록했다. “여기에서(계 6:9~11) 제단은 희생의 피가 부어진 희생 제단이다. 요한이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을 보았다는 구절은 죽은 자의 상태 또는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중간지대가 있다는 생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순교 당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한 것뿐이다”(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103).(목)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은혜의 기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자기 만족을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보내게 되면 저희는 스스로 저희 자신을 영생에서 끊어 버리는 것이 된다. 죽은 후에 유예 기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저희는 저희 자신의 선택으로 저희와 하나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를 만든다”(실물교훈,260).(금)
-교과본문 중에서-
성경은 내가 지지하고 믿는 어떤 교리를
뒷받침해줄 근거를 찾으려고 읽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생에 별 도움이 안될 것이다.
그 말씀속에 감추어진 보화같은 의미들을
깨닫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헷갈리는 비유들까지 사용해 가시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놓으신 말씀들을 오해하는 대신,
그 말씀 속의 참 의미를 깨닫고
감동하고 회개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그런 제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가족 동행 아픈 사람들 위해 기도합니다.
'큐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삿1:7 죄를 깨닫는 타이밍 (0) | 2022.11.24 |
---|---|
약3:17 위로부터 난 지혜 (0) | 2022.11.23 |
변화시켜 주시려는 사랑 (0) | 2022.11.20 |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 (0) | 2022.11.19 |
삿1:1 응답받는 기도 (0) | 2022.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