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너희는 가서 … 배우라.
이는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이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호 6:6). ‘긍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탄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언컨대, 제사와 같은 모든 희생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은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만나주석)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가서 다시 말씀을 배우라고 하셨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매일 말씀을 읽고 외웠으며
백성에게 그 의미들을 설명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가르치면서도 그들은
말씀의 참 의미와 정신은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말씀을 어떻게 보면
의미와 정신은 쏙 빼놓은 채
헛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일까?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사랑 없이 형식만 지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매일 아침 큐티를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보고 하기를 몇십년째 하는 중인데,
왜 여전히 나는 사랑을 할 줄도 모르고
맨날 똑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을까.
내 가까이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반평생을 바친 분인데
여전히 그분의 입에서는 독설이 나오고
가족과의 관계가 평안하지 않다.
왜 그런 걸까?
자아를 내려놓지 않아서?
겸손하지 못해서?
자아를 내려놓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려울까.
겸손하게 사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오늘도 나는 속절없는 죄인이다.
예수님이 내게도 가서..다시 배우라..고
하실 것 같아서 답답한 아침이다.
아버지, 도와 주세요.
겸손하길 원하고
사랑하길 원합니다.
형식만 있는 신앙 아니라
사랑이 있고 향기 나는 신앙 하기를 원합니다.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가족 동행들 형식적인 신앙중인 사람들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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